경배와찬송/성지순례

한국 성지 순례 사진 모음

선하도영 2007. 7. 23. 19:40

 

▶ 발안 제암리교회

3·1운동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은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을 불 질러 21명을 학살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며 초가 32채를 불태워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든 비인간적인 일제의 포악의 바람이 할퀴고 간 현장이다.


△ 제암리교회 전경



△ 23명의 순교자 합동묘지


▶ 해미 생매장 순교지

해미 성지는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0년의 박해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그 서슬이 끊이지 않았던 이곳은 수천 명의 이름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에 생매장 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여러 박해기간을 거치면서 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뿐 아니라 해미진영 단독으로 내포지방의 교우들을 잡아 죽였다.


△ 수천명의 순교자 합동묘


박해기간 동안 해미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에 끌려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해미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었고 냇물은 핏물로 항상 얼룩진 붉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 박해 때는 시체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한꺼번에 생매장을 하였고 해미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데나 땅을 파고 그 구덩이에 산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이렇게 쓰러져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는 걸로 추산하고 있으나 그들 중 약 70여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 석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무명 순교자 들이다.
이들이 숨져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되어있고 “예수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들었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는 생매장 순교지 는 현재 16개의 순교 탑과 생매장 터인 진둥벙이 14처와 노천성당으로 단장되어 보존되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감옥 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남아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 돼 있고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어 전시돼 있다.


△ 대성전


△ 야외 예배 미사 드리는 곳


▶ 김제 금산 'ㄱ'자교회

100년 전에 “ㄱ”자 형으로 지어진 교회로 지금까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하나뿐인 교회이다.

수십 개의 신흥종교들이 하나의 단지를 이루다시피 하고 있는 곳에 놀랍게도 일찍이 교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 기울어져 가고 있던 1904년 무렵 미국의 젊은 선교사 테이트 (L.B.Tate) 목사는 사교가 우글거리는 이 금산리에 꼭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 지금도 잘 보존되어진 "ㄱ"자교회


테이트 목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정읍 간을 말을 타고 왕래하며 그 중간지점인 금산리에 머물곤 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고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믿었던 보수 가문이었다.

어느 날 조덕삼이 먼저 마방의 손님인 테이트 선교사에 접근하였고 둘은 서로 많은 교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드디어 그는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테이트에게 말한다. “선교사님, 앞으로는 저희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이래서 오래도록 기도하였던 테이트의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으며 금산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 시작되었다.

이 금산교회가 시작되는 데는 또 한명의 빼 놓을 수 없는 주역이 있다. 이자익 목사이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이다.

이 무렵 이자익 청년은 조덕삼 씨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그는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무학자였지만 매우 총명하여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 하였고 또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이 두사람과 박희서가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금산교회는 신앙적으로도 놀라운 일이 또 있었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로 불어나자 장로 한분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 웅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봉건적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조덕삼 웅은 의연히 교회앞에 나가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면 주인과 마부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로 두사람이 열심히 자기 직분을 다하였다. 그 뒤 조덕삼 웅도 장로가 되었지만 그는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시키고 목사가 되기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금산교회에 초빙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하여 교회가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세 번씩이나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많은 업적을 남기에 되었다.

※ 왜 교회당을 “ㄱ”형으로 지었는가?

한쪽 날개는 남자석, 다른 한쪽 날개는 여자석.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구조이다.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고, 틈새가 나는 중간에는 흰 포장을 치기도 하였다.


△ "ㄱ"자 교회와 현재 금산교회 그리고 종각


△ 종은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 영광 염산교회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6·25동란 때인 9월 29일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이 10월 7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교인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때 전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했다.


△ 77인의 순교탑과 뒤쪽은 염산교회



▶ 영광 야월교회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지방유지 들을 매수하여 친일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뜻있는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대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 소록도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운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지만 현재는 900여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또한 소록도병원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지 자료가 전시된 생활자료관은 한센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 소록도 교회 전경


포두면 남성리


▶ 여수 기독교성지 (애양원,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등)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세워진 애양원은 1939년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으며 애양원 병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사역했던 곳이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 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이외 수많은 교민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50년 6.25 동란때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두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아들로 삼아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품안에 돌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도 끝내는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공산당에게 순교당했다.
현재 애양원 기독 성지 안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의료, 직업, 정신적 재활을 돕는 사회복지 법인 애양원이 있고, 병원으로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여수애양병원이 있다.


△ 순교기념관


△ 여수애양병원


이 병원안에는 정형외과, 피부과, 마취통증과, 내과등이 있으며 특히 정형외과는 각종 마비현상과 골절, 인공관절등의 수술로 유명하며 연간 4만여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으며 3천여 환자를 수술하므로 한국 단일병원 관절 수술로는 한국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성산교회(애양원교회)가 설립 100주년을 자랑하고 있으며, 노인 한센병 환자들의 평안한 여생을 위한 쉼터인 애양평안요양소, 애양재활직업보호소 그리고 토풀원장의 신앙정신이 살아있는 토풀하우스와 한센병 치료체험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애양원 역사박물관, 통나무식당, 성경암송관, 초기 한센병 환자 주택, 치유된 환자들의 정착마을인 도성마을, 순교자 손양원 목사 부부와 아들 동인, 동희의 묘지, 그리고 순교기념관등이 잘 가꾸어 보존되어 있다.


▼ 그림을 클릭하면 보다 자세한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애양원 순교성지 안내도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순교자들의 존영과 순교 사료 보존 및 전시와 기념공원조성 등 순교신앙 전승운동에 부응하는 영성훈련 장으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한국교회의 중지를 모아서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고자 1989년 11월 11일에 건립했다.


△ 순교자 기념관 전경



△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순교자 기념 돌판


△ 순교자 기념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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