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蕙錫 : 1896∼1948)
Vitali Chaconne-in-G-Minor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에대한
한계와고뇌, 아내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시작했다.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자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수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관념은
상대적이고 인습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우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
는 자주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제가 언제 누구에게 들은얘기인지는 기억이않나지만
현재의 안양과 독산동 중간어디에선가 길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시흥어디쯤 되리라.......
어느설 (說)이 정확한지는 알수가 없네요.시대를 잘못타고난 비운의천재라고나할까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그대여,고이 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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