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기쁨이었다. 그는 옹주를 낳은 복녁당에게 서운한 기색 없이 즉시
종 1품 귀인으로 승격시켜 복녁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하고 거처를 마련해주었다.기록에 의하면 후궁들은 총애도에
따라서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후궁들 중에서는 복녁당 양씨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옹주를 사랑했는지 하루는 유모가 젖을 먹여야
한다며 고종 품에 있는 옹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고종이 유모를 막으며 "과인이 보는 앞에서 옹주의 젖을 먹이도록 하라.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지 보고싶구나."라고 하여 유모를 당황하게 했지만, 고종은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 것을 보자 몹시 흐뭇해 했다고 한다. 게다가 옹주와 함께 대전에서 잠들며 자장가를
불러준다든지, 옹주가 밥을 먹으면 항상 자신의
수라 옆에 옹주의 상을 따로 받아 같이 먹는다는지 하는
행동은 궁중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했다.
옹주 나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옹주를 위해 궁안에
유치원을 세운 고종은 옹주와 옹주 또래의 사대부집 딸아이들이 재미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인 데라우치가 다가와 "폐하. 따님을 참으로
귀애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라고 말하자 고종은 웃으며
"경에게도 저만한 딸이 있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저만한 딸이 있는데... 무척이나 보고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근심이 있소."
"무엇이옵니까?"
"저 아이 나이가 다섯 살이라 옹주의 직위를 줘야 하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안타깝구려."
그러자 데라우치는 고종의 속내를 알아채고, 순간 고국에 있는 자신의 딸애가 생각나 눈물 지으면서 즉시 덕혜옹주가 정식으로 옹주의 직위를 부여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고종은 특별히 옹주를 위해 경복궁 안에 유치원을 하나 마련하여 옹주 뿐만 아닌 일반 사대부집 여아들이 자유로이 출입하며 옹주와 놀 수 있도록 배려를 했는데 유치원에 있는 여아들은 대부분이 여흥민씨와 안동 김씨가 주류를 이루었고, 대략 8명 안팍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루는 옹주와 함께 놀던 민씨 여아가 소변을 참지 못해
유치원 바닥에서 선 채로 실수로 오줌을 누며 울자 옹주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를 풀어 울고 있는 여아에게 입혔다고 한다. 이 일화를 살펴보면 옹주가 얼마나어린 나이인데도 조숙했는지 잘 보여준다.
1919년, 고종은 한많고, 비극적인 군주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눈을 감으면서까지 그는 딸 덕혜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일부에서는 고종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다 거기에 탄 독극물에 의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13살의 나이로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옹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왕녀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학습을 했다. 그녀는 1930년 앞서 이야기를 한 바와 같이 대마도주인 종무지와 강제 혼인을 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결혼을 해서도 여전히 자신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남편인 종무지와의 정략결혼이 좋을리 없다. 종무지는 대대로 대마도에서 살아왔고, 옹주와 결혼을 하는 조건으로 백작의 직위를 하사받게 되어 많은 과수원과 땅을 상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궁합은 그리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 종무지는 옹주를 강제로 범하며 딸 마사에(정혜)를 낳게 한다.
일본은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게 되고, 종무지 또한 활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항간에서는 전쟁터에서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망인이 된 덕혜옹주는 혼자 힘으로 딸 마사에를 기르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딸 마사에는 어머니가 조선의 왕녀라는 사실을 아주 민감하게 거부 반응을 하면서 어머니를 반대했었고, 순수한 일본인이 되고싶다고 자주 말을 해 덕혜옹주와 심한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마사에와 덕혜옹주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고 하는대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당시 조선사람에 대한 대우가 좋지 못한 것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사이의 모녀는 아닌 것 같다.
딸 마사에의 죽음은...
첫번째 가정은 마사에가 등산을 나갔다가 실종이되었다고 하고, 두번째는 히로시마 원폭이 터질 때 히로시마에 있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딸의 죽음과 자신의 고단한 삶에 염증을 느낀 옹주는 정신질환을 겪에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녀의 곁으로 자주 이방자 여사가 다녀갔었다고 한다.
1962년 1월, 옹주는 정신질환 등의 병이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도 오고싶어했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후 헌종대왕이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는 낙선재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그녀를 모시던 상궁과 유모가 그녀의 노회한 모습을 보자 할 말을 잃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4월 21일, 실어증과 정신병으로 고생을 하던 옹주는 그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경력】
1919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
1925 일본 학습원으로 연행됨
1930 조발성치매증으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
1931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 후 딸 '마사에'를
낳음
1962 귀국
--웹발췌--
*귀국하게된동기는 덕혜옹주의 시아주버님이
--어려서 고종께서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했던
사람의형-- 될뻔했던 일본특파원기자로 가있던 "김일한" 이라는분이 덕혜옹주를 수소문 해서 병원으로 찾아가니 병원의 철창에 갇혀있던 옹주의 모습이너무나 처참해 "김일한" 이라는분이 그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뒤 그분이 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덕혜옹주의 귀국을 도와줄것을 부탁해 귀국하게 되었다고함. "김일한" 이라는분의 아들은 현재 생존해 계시더군요.
그리고 덕혜옹주의딸 마사에는 "나는 어느산(잊어버렸음)에서 자살한다" 는 유서를 써놓고 홀연히 사라졌다고함. 어린나이에 일본에 정략결혼으로 떠난 비운의 덕혜옹주.
너무나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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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옴 from 제민일보]
[고종황제의 외동 딸 덕혜옹주의 비참한 생애 이야기]
작성자 : 김종욱
2007-07-30 23:05:01
[고종황제의 외동 딸 덕혜옹주의 비참한 생애 이야기]
덕혜옹주는 고종께서 마지막으로 보신 외동 따님이십니다.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를 낳은 생모는 양씨(梁氏)로써 복녕당(福寧堂)이란 당호(堂號)를 갖고 있습니다. 이때 고종께서는 명성황후 이후 맞아들이셨던 엄비(嚴妃)를 저 세상으로 보내신 지 1년 뒤였습니다. 그런데 궁인 양씨를 통하여 이처럼 예쁜 따님을 보신 것입니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개월 후인 7월 12일에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서 왕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으로 옮겨오게 할 정도로 왕께서는 옹주의 귀애하는 모습이 대단하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종은 이미 순종과, 의친왕(義親王), 영친왕(英親王)의 3형제를 두셨으나 생존하여 있는 따님으로서는 덕혜옹주가 처음이었으므로 이처럼 옹주를 편애하고 지극한 정성을 보임은 측근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읍의 눈물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옹주의 생탄(生誕)이 이번이 그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명성황후께서 낳으신 공주와, 내안당(內安堂) 이씨가 낳은 딸까지 합하면 모두 세 분의 따님을 얻으신 것이 되나, 모두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네 번째로 태어난 덕혜옹주야 말로 금지옥엽이 되신 것이죠. 고종께서는 언제나 덕혜옹주를 무릎 위에 앉혀놓으시고 옥좌(玉座)에 앉으셔서 궁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이 아기를 좀 보려므나. 손을 좀 만져보아라." 말씀이 계시면 궁인들은 소위 "저희들이 어찌 아기씨의 손을 만져볼 수 있겠사옵니까." 하고 피하면 고종은 그래도 궂이 궁인들에게 아기의 토실토실한 손목을 쥐어보게 하셨답니다. 이렇게 전하는 것은 이미 돌아가신 김명길(金命吉) 상궁의 말씀이셨는데, 아울러서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의 왕녀 님이라 하지만, 덕혜옹주는 부왕(父王)께는 세상에 다시없을 듯이 무척 사랑을 받으셨죠. 유모도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아마 임금님의 앞에서 들어 누울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변(邊) 유모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변 유모의 본 이름은 변복동(邊福童)입니다. 이 유모는 원래 남편 되는 분이 있는 사람으로 그녀가 다행스럽게도 귀하디 귀한 왕녀의 유모로 발탁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녀가 앞으로 집안 살림을 보살필 수 없을 것을 지레 알고서 남편에게 다른 여인 한 사람을 붙여주고 입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아기씨에게 젖을 물리고 재우고 있을 때에 그것을 알지 못하시고 아기를 보려오셨던 왕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는 얼른 몸을 뒤로 돌리시고, 유모는 기급을 하여 몸을 돌쳐 일어나려 하면 왕께서는 오히려 유모에게, "아니다. 아기가 자다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괜찮다. 그대로 누워있거라." 하시면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를 낳으신 분은 양씨(梁氏)라고 하는 분임은 잠깐 앞에서도 밝혔거니와 그녀가 궁인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의 친정 오라버니는 큰 부잣집을 상대로 하여 쇠고기를 대어주는 행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양씨가 입궁하여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어여쁜 옹주를 낳았으니 그 오라비 되는 사람의 거들먹거리면서 젠체하는 허세꾼이 되었는 바, 그가 바로 덕혜옹주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입니다. 일개 고깃 근이나 받아다가 집집마다 쇠고기나 날아다 주었던 그가 하루 아침에 누이 하나 잘 둔 탓으로 당상관의 조복(朝服)을 척 걸쳐 입고 덕수궁의 정문을 제 마음대로 호기 있게 드나드는 팔자가 될 줄이야 어느 누구가 알았겠습니까? 덕혜옹주는 크면서 이 삼촌을 그렇게 잘 따랐다고 하는데, 보모상궁(保姆尙宮)의 말에 따르면, " 우리 아기씨가 얼마나 영특하신지, 글쎄 친 외삼촌이 들어오시면 < 양상관(梁上官)이가 온다> 하시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니, 쇤네가 옹주아기씨께, <그럼, 아기씨의 외가댁은 어디시오니까?> 물으면 <죽동(竹洞)!>하시질 않겠어요?" 여기서 죽동은 옛 명성황후의 친정 집 동생인 민영익(閔泳翊)이 살고 있는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킵니다. 어느 사람이 옹주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는지는 알지 못해도 서녀(庶女)의 입장에서 적모(嫡母)의 친정을 옹주의 외가라고 알게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고종께서는 울분과 실의(失意)의 나날 속에서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시는 것으로 위안을 얻으시고 어느 듯 덕혜옹주가 5살이 되자 덕수궁 안에 즉조당(卽祚當)이라고 하는 어린이 유치원을 차려주셨습니다. <한국교육사(韓國敎育史)>=韓彦基 著=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즉조당이야 말로 한국에서의 유치원으로는 효시(嚆矢)를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모(褓母)는 일본인 "경구(京口)"라는 여인을 두고, 또 한 사람의 한국 여성을 두었는데 덕혜옹주와 같이 놀아주고 노래와 유희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나이가 모두 덕혜옹주 또래들로서 당시 명문 귀족의 딸들 10여 명이 그 전부였습니다. 고종께서는 언제나 덕혜옹주가 보고 싶으시면 즉조당으로 납시어 옹주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시고 저녁 땅거미 질 무렵에는 옹주를 들어 안으시고는 내전으로 듭시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고종께서는 한 가지의 고민이 계셨습니다. 그것은 옹주가 지금 5살의 나이가 되도록 옹주의 호(號)를 지어주지 못하신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사실 자체가 정말로 그러했언던가의 여부는 알 길이 없으나마 총독부의 간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총독부는 조선 왕족의 수를 더 이상 늘리지 않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서 그와 같이 음험한 정책을 써왔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제 조선의 국왕도 아닐뿐더러 빼앗긴 국가의 일개 존칭 만으로서의 '왕'이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지시를 아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께서는 옹주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한 한 가지의 좋은 생각 한 가지를 떠올리셨습니다. 그것이 잘 성사된다면 옹주를 정식으로 왕가의 계보에 입적을 시킬 수사 있을 것이며, 그래야 옹주의 호도 만들어 줄 수가 있겠으므로 기회를 찾고 있었던 차에, 어느 하루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고종께 문후(問候)를 드릴려고 덕수궁으로 입내(入內)하였을 때 고종께서는 총독에게 자연스럽게, "어린애들은 참 천진스럽고 귀여운 것이 아니겠소? 요즈음 궁내에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뛰어 놀 수 있는 유치원 하나를 창설하였더니, 그 애들이 찾아와서 맘껏 뛰어 놀고 재롱들을 떠는 걸 보니 세상의 온갖 속악(俗惡)한 것들을 일순간에 잊을 수가 있는 것 같았소." 말씀하시니, 총독도 따라서, 고종께, " 예, 폐하의 말씀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소인도 어린아이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였습니다. 고종께서는 다시 그에게, "그럼, 오늘 어디 유치원 구경을 한 번 해보고 가시지 않으시려오? 총독도 정무(政務)에 시달리시느라고 노고가 많으실 텐데, 잠시동안 머리를 좀 식히고 가시구려," 말씀하시고 고종께서 먼저 행보(行步)를 띄셨습니다. 고종은 함녕전(咸寧殿)을 나오셔서 유치원이 있는 즉조당으로 앞장을 서서 가셨습니다. 이때 유치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처럼 재롱을 떨며 고개를 좌우로 갸웃둥 하면서 노래부르고 있는 아이들의 애 띈 모습에, 총독은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었습니다. 노래가 다 끝나고 난 뒤 총독은 아이들 앞으로 걸어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주고 정감 어린 듯한 말로 아이들의 이름도 묻고 미소도 지어 보이니깐 아이들은 천진스럽게 총독의 팔에 안기는가 하면, 품속까지 파고드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께서 한 어린아이를 덤썩 들어올리시더니, 옆에 있는 데라우찌 총독에게, "바로 이 아이가 내 귀여운 딸이라오. 나는 이 애가 있어서 하루 하루가 즐겁다 오. 이제 내 만년의 즐거움은 모두 이 애로부터 나오는구려." 하시면서 희색이 만면하신 표정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총독은 짐짓, 반색을 하면서, 얼른 옹주를 고종으로부터 받으시고, " 아아, 폐하께옵서 이렇게 아름다운 따님을 두고 계셨습니까?" 하고, 곧바로 옆의 수행 직원에게, "지금 폐하께옵서 이처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말씀을 하시니, 아무리 누가 뭐라 했든지 간에 먼저 내렸었던 지령문을 취소하여야겠다." 면서 조선 왕궁 내의 소생왕자나, 공주, 옹주의 명칭을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던 총독부령을 일시에 걷우어 드리도록 명령을 즉석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옹주는 입적(入籍)이 되어 일본정부가 인정하는 조선 왕족의 일원으로서 왕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덕혜옹주의 덕수궁 유치원 시절의 생활은 이후 아무 탈 없이 자나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덕혜옹주 유치원 시절의 이야기를 김 상궁을 통해서 들은 바대로 전개한다면 이렇습니다.
즉조당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2층으로 된 목조건물입니다. 즉조당 유치원은 덕혜옹주를 위해서 차려진 유치원으로서 귀족의 딸 10여 명이 덕혜옹주의 친구가 되어 소꿉놀이도 하고, 손잡고 뛰어 놀면서 하루 하루를 즐겁게 지냈습니다. 즉조당 유치원에 풍금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아주 새 것입니다. 먼저 썼던 것은 어느 예배당에 있던 것을 잠간 가져다 썼던 것인데, 이번에 아주 새 것으로 풍금 한 대가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조선에도 동요가 많습니다. 일본 동요도 들여다가 조선 동요 가르칠 때, 일본의 동요도 함께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명의 원아(園兒)들 가운데 덕혜옹주가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이때 옹주의 나이는 6세였습니다. 당시 옹주와 함께 원생이었던 민덕임(閔德任) 여사는 그 당시를 떠올리면서 덕혜옹주가 그 어린 나이임에도 불고하고, 생김새와 똑같이 매우 점잖고 의젓하였다고 합니다. 원생들이 비록 나이가 옹주보다는 한 두 살 위이기는 하였지만 옹주에게는 깍듯이 '아가씨'라 불렀고, 존대어로 '그랬습니다.'라는 공대(恭待)를 받는 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옹주는 그 친구들에게, 의례껏 하대(下待)를 하였다고 하는데, '응, 그랬냐?' 또는 '~해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 원생 중 한 아이가 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그만 치마 입은 채로 그 자리에서 쌌더랍니다. 이 아이는 옹주가 훌훌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옹주는 이렇게 인정도 많고 친구아이들과 우애가 매우 깊었었던 것이죠. 원생들 가운데에는 대부분이 종실과 척족(戚族) 민씨의 딸들이 많았었는데 그 아이들은 일본 기모노 옷을 입고 머리에는 꽃 리본을 단 채로 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전에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조중응(趙重應)과 같이 살고 있는 일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있었는데, 그 일본부인은 광강죽자(光岡竹子)라 하여 조중응에게 오기 전에 일본 동경에서 모 출판사 사장의 부인이었었답니다. 사장이 죽자 과부로 있다가 망명 왔던 조중응과 붙어살면서 부부가 된 것입니다. 조중응은 일본으로 몸을 피하여 와있으면서 동경외국어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아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광강죽자와 만나 정분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조중응이 몸이 풀리어 다시 조선으로 건너간 이후 그가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급히 서둘러서 간단한 옷가지 몇 점만을 가방에 넣은 채 불야 살야 조선 땅으로 건너왔던 겁니다. 그러나 조중응에게는 본 부인이 있었을 뿐더러 결국 그 여인은 조선 땅에서 발붙일 데를 잃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중응이 이 여인의 난처한 꼴이 되어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조중응은 고종 황제에게 그 딱한 사정을 품해 올리니, 황제께서 서로 어려운 때에 만난 두 사람이었으니,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본 부인을 우 부인(右夫人)으로 하고, 일본 부인을 좌 부인(左夫人)으로 하랍시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입니다. 덕혜옹주에게는 이처럼 천진난만한 시절도 잠깐 8살이 되었을 때에 고종이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그로부터 덕혜옹주 비운(悲運)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으로 인질이나 다름없는 일본황실의 술책으로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이와 비슷한 일이 아직 나이 어린 덕혜옹주에게 까지 돌발적으로 닥치지 말라는 법도 없지는 않을 것 같아서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찍 약혼을 하여 그 사실을 널리 공표 함으로써 영친왕과 같은 억울한 경우를 면해보려고 김황진(金璜鎭)이란 시종(侍從)을 불러들여, " 경에게 아들이 있는가?" 하문(下問)하시니, "신에게는 딸자식 하나가 있사 올뿐입니다." "그럼, 조카는 있는가?" "예, 신에게 아우가 여럿 있어서 조카아이들은 많사옵니다." "그렇다면, 경의 조카 한 사람을 내어 놓으라." 명령하시므로 김 시종은 자기의 아랫 아우의 아들을 천거(薦擧)하여 그날 밤으로 김 모라고 하는 무예청(武藝廳) 별감(別監)을 시켜 김 시종의 조카를 덕수궁 안으로 입내(入內)시켜 그 날 밤으로 고종은 선을 보았습니다. 그는 덕수궁 정문을 통하여 입내하질 못하고 몰래 불러들여 안으로 들어가는 입내였으므로 덕수궁의 담장이 원래 얕은 것을 알고 그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만 하여도 덕수궁 안에는 매국노(賣國奴) 이완용(李完用)이 풀어놓은 궁녀들이 사방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김 시종은 조카를 떳떳이 정문을 통해 데리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이처럼 담 장을 넘어 몰래 숨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께서도 흡족해 하시고 김 시종의 조카를 양자로 삼으신다 하시고는 장래 덕혜옹주와의 가약(佳約)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추진되었던 이 사실이 뜻밖에 밖으로 새어나가 결국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김 시종은 직위해제를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안타까운 마음 어쩔 도리 없이 김 시종을 아끼는 마음 변함은 없었지만, 결국 김 시종이 물러난 뒤에 덕혜옹주의 밀약(密約)은 한갖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 그리고 고종께서도 그 해 1918년 12월(음력=양력으로는 1919년)에 승하하심으로 해서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시름과 한숨, 눈물 속에서 커나가야만 했었습니다. 덕혜옹주는 부왕의 상(喪)을 눈앞에 놓고 일본 시정자(施政者)들의 성화로 일본인 소학교인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입학을 함으로써 영친왕의 경우와 똑같은 운명으로 일본으로 떠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덕혜옹주를 낳은 양 귀인도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덕혜옹주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모릅니다. 운명의 장난에 벗어나지 못함이 인간사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것임은 부정하지는 못할 일이로되, 덕혜옹주가 살아나갈 길이 이렇게 정해져 있는 이상 그녀는 어떻게 더 버티고 고집을 부림으로 해서 이 난국을 타개할 방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 땅에 발을 디딘 덕혜옹주는 오빠인 영친왕이 살고 있는 궁(宮)의 일우(一隅)에서 가지고 온 짐을 풀었으며 왕공 귀족(王公貴族)이 다니는 학습원(學習院)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덕혜옹주가 학습원을 마친 때에는 이미 나이 19세를 맞는 어엿한 처녀 규수가 되어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덕혜옹주는 학습원을 마치자 이미 그 나이 19세 때에 짜놓은 각본과 같이 조선왕족들은 반드시 일본 왕족이나 사람들과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규정을 그네들이 만들어 놓았으므로 일본측에서 덕혜옹주의 결혼 대상자를 대마도(對馬島)의 번주(藩主) 백작(伯爵) 종무지(宗武志)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당시 궁중에서 일을 보았던 일본의 늙은 궁인들이 떠올려 하는 말에 의하면, 종무지는 눈 하나가 불구인 애꾸눈이었고, 키도 아주 왜소(矮少)하였으며, 얼굴도 아주 못생긴 추남이어서 덕혜옹주가 이 사실을 알고 끼니도 끊어가면서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 궁녀들은 평소엔 덕혜옹주를 향하여 일본말로 "공주님, 공주님" 하였지만 남들이 안 보는 데서는 덕혜옹주의 옆으로 바싹 닥아 들면서, "정말 시집을 안 갈 거야? 안 갈 거야?" 하고 가뜩이나 마음 못 잡고 있는 옹주에게 욱박을 지르는 통에, 덕혜옹주는 그때로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결국은 사전 계획에 따른 정책적인 결혼이었기 때문에 덕혜옹주는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 백작 종무지(宗武志)와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3년 동안 같이 사는 동안에 옹주는 정혜(正惠)라는 딸아이 하나를 낳고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종무지와의 결혼 생활도 그로써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고, 한참 잘 컸었던 딸 정혜는 오히려 어머니인 덕혜옹주를 많이 동정하여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안 보고 오히려 덕혜옹주와 함께 그 집에서 탈출해 나와 이름 없는 한 작은 섬에서 3년여를 같이 살다가 어느 하룻날 정혜는 바다에 몸을 던져 투신 자살을 하였습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마는 그녀에게 닥쳐오는 시련은 신병에 대한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이 정신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 이상 험난한 시련은 그녀에겐 없었던 것이었죠. 이때는 이미 조선이 일본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찾았던 시기였고, 이후 정신병자 덕혜옹주를 영친왕 이은(李垠)씨가 돌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이복지간(異腹之間)이었지만 이은씨의 동생 아끼는 그 참마음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를 못하였습니다. 덕혜옹주는 동경의 교외에 있는 송택병원(松澤病院)에 입원해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일본은 패전국으로서의 물가고(物價高)도 높았고 덕혜옹주에게 들어가는 치료비는 당시 1만 엔(円)이란 거금이었다고 하는데 영친왕은 이 큰돈을 아깝다 생각하질 않고 후일 옹주가 한국에 돌아올 그 날까지 계속 대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때 당시 신문기자로 일하고 계셨던 김을한(金乙漢)씨가 덕혜옹주가 입원하였던 병원을 찾아와 보고 그 인상기 하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그 길로 나는 동경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 병원으로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송택병원에 가보니, 무슨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돌며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마치 감방 모양으로 쇠창살로 막고 있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가,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췄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 여세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후신(後身)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 동안을 오래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 하실까? 어느 나리이고 왕가의 종말에는 허다한 비극이 깃드는 법이지만 고종의 고명 따님이신 덕혜옹주의 말로가 이다지도 비참하게 될 줄이야 어찌 뉘라서 상상인들 하였으랴!" <"인간 이은(李垠)"> P. 56. 김을한 씨는 이 글 외로도 직접 들려준 이야기는 더더욱 비참하였습니다. 덕혜옹주가 갇혀있는 독방은 독방이 아니라 한 방에 서너 명의 걸인(乞人)과 같은 여인들이 둘러앉아 화롯불을 쪼이면서 화롯불을 쪼이고 있는 그 손들이 모두 새까만 것이 가만히 보니 때는 11월이었고, 양말도 신지를 못한 채 맨발이었다는 것입니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 고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옹주가 고국 땅에 돌아오기까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배려와 힘이 컸었고, 음으로 양으로 언론인 김을한 씨의 적지 않은 힘과 운현궁의 박찬주(朴贊珠) 여사의 노고가 없었던들 옹주의 귀환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덕혜옹주가 귀환하여 고국에 돌아왔을 때의 옹주의 나이는 이미 50을 넘기고 있었습니다.처녀시절 일본에 건너갔을 시에는 그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던 덕혜옹주의 패기 찬 모습은 지금 40여 년을 지나서 고국 땅을 다시 밟는 불쌍한 덕혜옹주 지금의 모습에서는 아예 처녀시절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녀가 고국 땅을 다시 첫발을 내디디고 저 했을 때 옹주를 길러주었던 유모 변씨가 달려와 옹주를 끌어안으면서 "아기씨! 아기씨!" 하며 달려들어 엉엉 울다가 그만 혼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광경을 덕혜옹주는 느끼지도 못하고 넋 나간 멍한 눈길로 쓰러진 유모를 잠깐 내려다보고 말았다고 합니다. 단 어떠한 한 마디의 말도 하질 못하고 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유모 변씨는 세상을 하직하였고, 옹주는 아직도 정신질환이 모두 치유가 되질 않아서 짙어진 병색은 그녀를 더 오래 살아있게 하진 못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어느 날, 별로 이름 없는 병원의 한 병동에서 고요히 고통 없는 생애를 막음하였습니다. 그래도 바로 이 해에 친지 몇 사람과 늙은 상궁들 몇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화려하지 않은 조촐한 환갑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요.
1917년,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황녀로 정식 입적되었다.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끌려간 1925년도쿄 학습원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의 죽음을 계기로 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황후 사다코의 간계로 1931년5월 8일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정략 결혼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이혼하였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1962년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 기자 출신인 김을한에 의해 알려지면서 한국에 귀국하였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덕혜옹주의 사연을 듣고는 그런 사람이 있었냐고 할 정도로 덕혜옹주는 자신의 고국에서도 관심받지 못했다.[1]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1961년2월20일 제정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에 의하여 구황족에 포함되었으며,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아서 생활하였다.[2]
덕혜옹주 글씨가 삐뚤 빼뚤한 이유
제국의 후예들 정범준 지음 | 황소자리 | 560쪽 | 3만5000원
역사를 읽는 방식은 사학자 수만큼 많다. 역사를 읽는 이유는 독자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이 책의 저자는 아마추어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 널려 있는 잡다한 자료들을 그럴듯하게 짜집기 하거나 어쭙잖은 사관(史觀)으로 사실(史實)을 왜곡·재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발로 뛰어 취재한 대로, 가능한한 많은 자료를 비교해 확신이 선 대로, 정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한반도 근현대 100년 역사의 발화점이자 심장부라 부를 수 있는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다. 관련자들의 삶을 있었던 모습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한반도 역사의 빈 페이지를 메우고자 했다. 당연, 만만찮은 않은 일이다. 저자의 말.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퍼즐 맞추기’에 가까웠다. 왜 이 기록과 저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을까. 무슨 법을 만들고 누구를 처형했다는데 구체적인 근거는 왜 제시하지 않았을까. 자료과 기록에 나타난 내용을 당대 신문·잡지·실록의 기사와 비교해나가자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알고 있던 막연한 풍문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는 인물은 영친왕 이은(李垠)과 영친왕비 이방자, 의친왕 이강(李堈)과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 등이다. 거기에 민갑완과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 황적(皇籍)에 올랐던 이강의 두 아들 이건(李鍵)과 이우(李?), 그리고 황적에 오르지 못한 후예들이 등장한다.
제법 비중있게 서술되고 있는 민갑완은 어려서 이은의 간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 했던 여인이다. 조선 황족과 일본 황족의 정략결혼, 소위 일선융화(日鮮融和)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비록 황족은 아니지만 그녀가 감내한 세월 속에는 대한제국 황실 내 어느 누구의 삶보다 애절한 개인사가 서려 있다.
황족들은 그들의 나약함이나 무능과 상관없이 몰락해가는 대한제국의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불씨였다. 특히 의친왕 이강은 무수한 풍문과 논란의 진원지였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주색으로 세월을 허송했다고 폄하했지만, 진위여부가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은 이강의 빛나는 독립운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바늘 끝처럼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인 덕혜옹주에게 망국의 공주 자리는 무겁기만 했다. 고명딸인 그녀를 애지중지 키웠던 고종 황제의 죽음, 일본인과의 정략결혼, 불행한 생활이 불러오는 과중한 심리적 고통은 그녀의 정신을 짓눌렀다. 덕수궁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결국 오래토록 정신분열증을 앓다 한으로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남겨 놓은 낙서만이 그녀의 오래된 고통과 외로움을 조용히 증언한다.
방대한 자료를 꼼꼼하게 비교·분석한 저자의 고투는 560쪽에 이르는 묵직한 기록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주석만 원고지 200장 분량이다. 우리 근대사가 황실 인물들의 생애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고 평가 받을 역작이다.
1962년 오늘(1월 26일). 조선왕조의 비극을 한 몸으로 살아온 비운의 황녀(皇女) 덕혜옹주가 37년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황제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나 망해버린 나라 황녀로써 감당 못할 역사의 짐에 짓눌린 덕혜옹주는 망국볼모의 치욕속에서 비극적 일생을 살았다.
덕혜옹주는 1912년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때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을 통해 얻은 외동딸이다. 그는 어린시절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쓸쓸해하던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천진난만하게 지냈다. 옹주 나이 7세때 고종이 승하하자 후손이 없던 순종은 옹주를 친딸처럼 돌봤다.
그러나 덕혜옹주는 13세되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로 일본에 건너가며 비극을 맞게 됐다. 이역만리 낯선 생활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옹주는 신경쇠약증세를 나타냈으며 17세때엔 생모 양귀인이 숨진 충격으로 증세가 심해져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자 일본은 19세된 옹주를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종무지백작과 결혼시켰고, 유일한 소생인 딸 (종정혜)을 얻었으나 지병은 도져만 갔다. 계속된 병상생활 끝에 53년 종백작과 이혼했고 단 하나의 혈육 정혜마저 결혼에 실패한 뒤 현해탄에 현해탄에 몸을 던짐으로써 옹주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해방후 고국에 돌아오려 하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50세가 된 이날에야 겨우 귀국한다.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몸으로 돌아온 그는 고독하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다 89년 4월 77세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낙선재(樂善齋)이야기
'낙선재'하면 조선왕조의 낙조(落照)를 상징하는 최후의 전각쯤으로 연상된다.
낙선재가 쇠잔해 가는 조선왕조 최후의 무대라는 감회를 느끼게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황태자였던 영왕 이은 이 1907년 12월 어느날 , 이 곳 낙선재 뜰에서 놀고 있다가 느닷없이 11세의 어린 몸으로 통감 이토히로부미에게 이끄려 일본으로 납치되어 끝내 볼모 신세가 되었고,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에 43세를 일기로 대조전 흥복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이후, 순정효황후, 세칭 윤 비도 장장 43년이라는 긴세월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랬다.
윤비는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에 융희 황제(순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움켜 쥐고 통곡하다가 숙부 윤덕영에게 강탈당하는 통분을 격기도 했으며,
<이토히로부미가 11세 난 영친왕을 납치할 때 찍은 사진 >
6.25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하여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대지월이라는 불교의 법명을 얻어 나라의 비운과 자신의 고독을 달래다가 ,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73세로 영욕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영왕 이은도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 가까스로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말을 못하는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의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었던 21세 때의 윤황후>
11세에 일본으로 납치되어 1920년 4월 28일 일본의 4대 귀족의 하나인 나시모토 미야케의 19세 난 규수(후에 이방자로 개명)와 결혼 했지만 ,
8.15종전으로 일본의 황족도 아니고 한국 국적도 갖지 못한 신세가 되어 20년 가까이 도쿄에서 생활하다가 볼모로 끌려간지 무려 57년 만에 식물인간이 되어 환국한 것이었다.
함께 돌아온 여왕비 이방자여사도 그 후 낙선재 생활 27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에 역시 이 곳에서 운명하였다.
이방자여사는 자신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에서 영왕과의 결혼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결혼직후 귀국한 영왕과 방자비 >
"나는 1916년 8월 ,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와 있던 영왕의 약혼녀로 정해졌다.
나와 이은 전하는 단순한 한일 민족융화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 투쟁의 음모 속에서 희생된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8월 첫아들 진을 안고 첫서울 나들이를 하였는데 사흘째 되던날 갑자기 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그 후 두고두고 이방자 여사는 아들 진의 죽음을 조선 사람들의 음해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뒤 경호와 최후의 진찰까지 일본 사람들이 도맡았는데 그 사실이 보다 더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종 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도 정신질환상태에서 독감으로 1989년 4월 21일에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덕혜옹주는 1912년 복녕당 양씨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옹주로서, 1918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와 약혼까지 맺었지만 별 수 없이 일본으로 업혀가고 말았다.
어머니인 양 귀인의 무릎에 싸여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아이었지만 ,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부랴부랴 늘상 가까이 있는 시종의 조카와 약혼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일본으로 납치되기 직전의 덕혜옹주(가운데 소녀)>
이와 같은 아버지 고종황제의근심어린 배려도 헛되이 1919년 고종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일본인들은 다음해에
10세 난 옹주를 납치하여 우리나라의 지위를 낮춰 버릴 셈으로 일개 대마도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대마도주 아들과의 동거 생활 3년 만에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낙선재 최후의 가족(왼쪽부터 이구,윤황후, 방자여사, 이구의 부인 줄리아 여사 >
이처럼 낙선재는 조선왕조 최후의 왕손들이 슬프고도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의 증손녀 이홍씨가 고종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재연한다. 오는 11일 저녁 8시10분에 방송되는 KBS1 ‘한국사傳-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 편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왕녀로 태어나 시대의 격랑을 겪어내야 했던 덕혜옹주의 삶을 조명하는 것.
이홍씨는 프로그램 속 재연을 통해 덕혜옹주의 성년 후 모습을 연기했다. 이홍씨는 “덕혜옹주의 결혼식 장면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때의 모습 등을 연기했다”며 “처음에는 출연을 거절했지만 나를 통해 고모 할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녀는 “연출 장면 중 기모노를 입은 모습을 마음이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촬영은 지난달 말부터 2주간 진행됐고, 덕혜옹주의 모습은 재연을 통해 어릴 적, 학창시절, 성년의 모습으로 나누어 촬영됐다. 어릴 적 모습과 학창시절 모습은 아역 배우가 재연했다.
이홍씨는 덕혜옹주의 모습에 대해 “쌍꺼풀이 없는 전형적인 한국 미인형으로 코 등이 작았다”고 회상했다. 실제 덕혜옹주는 아버지 고종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8살 되던 해 고종이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일본에 강제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후 정신분열증을 앓으며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해 조선인의 기억에서는 점점 사라져갔다.
이홍씨는 “덕혜옹주가 40세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고, 60세 안팎에 그 병원을 벗어나 귀국했다”며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의 간병을 받으며 80세를 앞두고 돌아가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1912 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약력사항
약력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 1925년 일본 학습원으로 연행됨 1930년 조발성 치매증으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를 옮겨 치료 1931년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 후 딸 마사에(正惠)를 낳음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 1962년 귀국
덕혜옹주
덕혜옹주
고종의 고명딸
고종이 지극히 사랑했던 고명딸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교육받고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신경쇠약증세로 입원 치료받다가 귀국하였으나 회복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도 고종의 회갑 해인 1912년 5월 25일이다.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이 그대로 적중하여, 덕혜옹주는 아바마마 고종의 축소판같이 닮았다. 바로 그 전 해에 엄비를 잃고 울적하던 차에 덕혜옹주의 탄생이 노왕 고종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는가는 실록에 나타난 바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를 낳자마자 즉시 그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날 왕이 산실에 아기를 보러 갔고,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생후 일주일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다. 그 다음날 6월 1일에는 순종 내외가 덕수궁에 부왕을 뵈러 와서 함께 산실인 복녕당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삼칠일 되는 날에는 종척 이하 칙임관 이상 직급에게도 왕이 축하의 내연을 베풀었고, 생후 약 2개월 후인 7월 12일에는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 침전인 함녕전으로 옮겼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