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해요.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죠.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어요.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죠.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켰죠.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되요.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죠.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답니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되요.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죠.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말아요.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들죠.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죠.
당시 비엔나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어요.
당시 비엔나는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엔나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삭할 수 없게 틀어지었죠.
비엔나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어요.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죠.
비엔나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답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죠.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게되요.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죠.
서구문명을 말할 때 단순하게는 서유럽에 구축된 문명,좀더 넓게 보자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계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그것을 계몽주의를 그 기원하는 사상으로 볼 수도 있고,
'진보'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요)을 의미하기도 하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의 유럽은 마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런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독립된 국민국가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 정치체제는 동시에 그로 인한 반동(향)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죠.
결국 이런 서구 문명의 정치 체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 그 강한 힘으로
자기를 낳은 문명 자체를 파괴할 듯한 위기를
되풀이해서 초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 문명은 이렇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쇠퇴해갔죠.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으로 둘러싸인 희망과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존경과 사랑을 받았죠.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답니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했죠.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해요.
그의 증세는 잠시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말죠.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어요.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 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죠.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요?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말죠.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지요? ^_^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다와요.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요?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을까...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지요.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았어요.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죠.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답니다.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에요.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한 기분..
2월 6일 클림트가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죠.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어요.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 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죠.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어야만 했답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와 창녀,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어요.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죠.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는-_-;;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을까요?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 것일까요?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어요.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지요.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어요.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마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이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되어갔지요;;)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위의 그림은 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입니다. 대가의 역량이 출중하여 확 느낌이 오지요.
푸른 줄기들의 노란빛,자주빛 꽃들의 축복속에서 두 남녀의 황홀한 포옹. 은은한 기분에 도취된
듯 하지만 통나무처럼 강인한 자세로 떡하니 서서 연인의 볼에 살짝 입맞춤하고 있는 남성.
사랑에 홀린 여인의 표정과 남자의 목을 감싸안은 채 안겨있는 절묘한 자세를 보세요.
환상속의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 결합 직전의 이런 하찮은 가벼운 입맞춤에서도
불타오르는 법입니다. 금빛이 얼룩덜룩으로 박혀있는 환상의 배경은 사랑의 신비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두 연인이 입고 있는 옷에 있는 장식들의 오묘한 색채와 도형의 조화를 보세요. 노란 색채의
향연 속에 간간히 박혀있는 검은 사각의 빛깔이 화려함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있죠. 여성의
옷속에서는 적혈구같은 작은 원형들이 동심원들의 퍼짐속에서 자리를 잡고 균형을 맞추어
주고 있습니다. 직선과 원형과 동심원들이 서로 화합하며, 화려한 장식과 색채로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지요.
사각형 도형의 직선성과 강인함은 남성의 옷에, 오밀조밀하게 둥근 부드러움은 여성의 옷에,
왼쪽의 남자는 너무 강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자로 서서 두께가 장난 아닌 목만 살짝
움직여 키스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정복자로서의 자만심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고 하겠지요.
화려한 빛깔의 공간에서 꽃들의 축복을 받으며 강인한 남성과 온화한 여성의 결합.
이것이 우리들 남녀가 추구하는 이상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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