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1900년대 초 우리나라 시장 풍경과 상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선하도영 2007. 8. 23. 15:58

						

1900년대 초 우리나라 시장 풍경과 상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이 사진들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너무 강렬합니다.

 

남루한 서민들의 모습.

불과 100여 년전 우리가 이런 삶을 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당시 지도층은 무엇을 했는지?

 

이 정도의 민족이 지금의 우리라니

우리 역사를 크게 자랑할 것도 못되는 것은 아닌지......

현재 진행중인 정부의 과거사 규명활동, 중국과 일본에 대처한 "역사 바로잡기"도

무색할 정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걔인이건 가족, 단체, 기업이건 국가건 간에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고 싶지요.

그러나 역사는 흥망성쇠의 연속이며 어떤 때는 커다란 슬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역사를 우리 이익에 맞도록 개조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참담했던 과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밝은 미래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성실한 한국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사진 출처 : 동아 닷컴 - "동진"

 

 

장돌뱅이 (메밀꽃)- 이종만

 

다듬잇방망이 만드는 노인 다듬이질에 쓰는 방망이를 깎는 노인. 남의 집 앞에 좌판을 벌였다.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목재소 긴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광경. 목공 둘이 위아래에서 톱을 마주잡고 끌고 당기며 나무를 켜고 있다. 주위에는 굵기별로 다른 재목이 쌓여 있다. 당시에는 집을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목재의 수요가 많았다.

 

 

통 만드는 장인 담장 앞에 좌판을 열고 통을 만들고 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능숙한 솜씨로 연장을 써서 나무를 만진다. 앞에는 견본품이 놓여 있다.

 

 

갓 공장(工 匠) 남자가 성인이 되면 상투 튼 머리에 갓을 썼다. 신분에 따라 갓의 종류도 다르지만, 대부분은 말총이나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만들었다. 단발령으로 갓의 수요가 줄었을 텐데도 좌판에서 갓을 고치고 만드는 공장(工匠)의 표정이 진지하기만 하다.

 

 

소쿠리ㆍ빗자루 장수 아이 둘이 장사에 나섰다. 한 아이는 소쿠리를, 다른 한 아이는 빗자루와 짚신을 둘러멨다.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을 팔러 동네를 한바퀴 도는 중일 것이다.
엿장수 엿판을 멘 엿장수가 가위로 엿을 자르고 있다. 단것이 귀하던 때여서 ‘엿장수 마음대로’ 잘라주는 엿 맛에 홀린 동네 아이들이 이제 곧 모여들 것이다.
물장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마실 물을 사먹어야 했다. 하천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장수들은 이른 새벽부터 단골집에 깨끗하고 맛난 물을 배달했다. 물지게는 등태에 가로로 길게 댄 막대기 양 끝에 양철통이나 나무통을 달아매 사용했다.

 

 

나무장수 땔감으로 쓸 솔가리를 황소 등에 싣고 시장에 나온 나무장수. 혹시라도 소가 달아날까 고삐를 꼭 잡고 있는 사내는 농한기에만 땔감을 해서 장에 내다 파는 농부인지도 모르겠다. 뒤로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성읍 인근이다.

 

 

나무장수 연료로 쓸 만한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던 시절, 많은 이가 산에서 나무를 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삿갓을 쓴 나무장수가 장작바리를 사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배추장수 배추를 밭에서 출하하는 광경이다. 밭주인인 듯 보이는 이는 검은 안경에 궐련을 피고 있고, 담뱃대를 문 장정이 지게에 배추를 잔뜩 얹어 일어서려 하고 있다. 김치의 주재료로 사용된 배추는 일찍부터 수요가 많은 채소였다.

 

 

소달구지 달구지는 소가 끌기도 하고 말이 끌기도 했는데, 바퀴가 두 개인 것도 있고 네 개인 것도 있었다. 대체로 북한지방에서 바퀴 두 개 달린 달구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은 손님을 기다리는 소달구지들.

 

 

밥상을 멘 장정 네모 반듯한 소반을 지게에 진 장정들이 웃고 있다. 소반이 널리 사용된 것은 독상이 주로 쓰인 데다 이동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손님을 치를 집에 밥상을 빌려주러 가는 길인지 밥상을 팔려고 장에 나온 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소달구지 성을 배경으로 소달구지꾼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있는 순검과 아낙들의 신기해하는 표정이 재미있다. 굴건을 쓴 것으로 보아 소달구지꾼은 상중(喪中)이었던 것 같다.

 

 

옹기장수 옹기는 독과 황갈색 질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백성들의 식생활이 장과 김치 등 발효식품 중심이었기 때문에 장독은 필수품이었다. 대개는 옹기점에서 팔았지만 사진처럼 지게에 옹기를 지고 거리나 집집을 돌며 파는 장사꾼도 흔했다.

 

 

닭장수 닭 요리는 음식이라기보다는 보신용에 가까웠다. 닭장을 통째로 지고 시장에 나온 청년은 갓까지 쓰고 있다. 아마도 정작 본인은 집에서 기른 닭으로 삼계탕 한번 못 해먹었을 것이다.

잡화상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물상이라고 불리던 잡화점에 농기구며 가정용품 등이 흩어져 있다. 재봉틀이 보이는 곳에 재봉소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음식점 길거리 쪽으로 음식재료를 펼쳐놓은 음식점. 뚝배기가 포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국집인 것 같다. 장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찾다가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이 국말이로 요기를 하던 곳이다. 서서 음식을 먹던 손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염색 가게 장터에 판을 세워놓고 옷감에 물을 들이는 모습. 가게는 뒤에 있었을 것이다. 물동이를 인 아낙이 지나가다 멈춰서 구경하고 있고, 사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아이 둘이 바라보고 있다. 맞은편에 안경방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