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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관광에서 폼페이 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지요

선하도영 2007. 8. 23. 17:09

						

 

  이태리 관광에서 폼페이 유적지를 빼놓을 수 없지요.
83년 여름 이곳을 관광한 적이 있었는데  "큰 저울의 양편 끝에

여자와 돈을 올려져 있는 벽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라고 무게로 여자의 값이 치러지기야 했겠습니까?   상징적 의미가...

아무튼 "심산"님이 보내준 이 자료로

폼페이의 도시 역사와 유적의 의미를 되새기기 되어 너무 좋습니다.

힘찬 한 주간을 맞기 바랍니다.

 

 

 

<Pompeii의 神秘>

Pompeii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1700년 동안
 
7~8 미터 화산 잿더미 속에 말없이 파묻혀 있었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 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 곳이 어디인지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 뜰에서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화산이 용암을 토하다.
 
그 당시 광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담아낸 모습..



잿더미를 걷어낸 폼페이 중심 모습이 Mt.Vesuvious 화산을 뒤로 한 전경.
 
<Pompeii의 발굴 경위>
 
- 1709년 4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최초 작업 인부에 의해 발견되다.
 
- 1738년 4월 밭 갈던 농부가 곡괭이에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입소문이 퍼지자,
 
당시 가장 유명했던 토목기사 "도메니코 콘타나"가
 
적극적으로 작업에 뛰어들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다.
 
- 1938년 12월 11일 "헤르쿠렐늄" 극장에 세워진 돌벽,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 원형극장 등이 발견되다.



원형 극장 전경 :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정도라는 기록인데,
 
실제 보면 20,000명도 넘게 들어 가는 수준이다.
 
발굴에 최대 공헌자는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하임 빙겔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이다.
 
1764년 "로마고대 미술사"를 편찬하여 학문적 체제를 확립하였고,
 
그 영향이 세계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세계 제1, 2차 대전으로 발굴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951년 "아메마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감독 아래 발굴이 다시 활기를 띠어
 
금일에 이르고 있으나 아직도 3/5 정도 밖에 발굴이 안 되었다고 한다.


 
황금시대를 구가한 화려한 벽화!
 
1748~1763년 본격적 발글을 시작하여 마침내
 
폼페이의 족보(근거)가 된 "rei publicae pompeianorum" 비문을 발견하다.



폼페이가 역사적으로 처음 언급 되기는 BC 310년 제 2차 "삼니옴" 전쟁때

로마의 함대가 "
사르누스" 강에 상륙하여 공격하려다 실패 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지만
 
BC 89년 로마 장군 "루키우스 코린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마침내 함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어딘지 모르다가 위 비석을 통해 마침내 Pompeii라는 사실이 판명되다.
 
AD 1803년 ~ 1873년 영국 역사 소설가 E. G 리턴에 의해 쓰여진
 
폼페이 최후의 날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더욱 세인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다.
 
이 소설은 빙겔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삼은 드라마다.




공창을 옆으로 낀 삼거리




현대식 이름을 빌리면, 최고급 콘도 휴양지 전경




휴양지 전면 풍경




VIP용 휴양지 입구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하는 시체의 모습





 
앉아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다가 그 재앙을 만났을까?





앉은 자세의 성교 장면 화석이 모조품이라는 설도 최근 흘러 다니고 있다.
 
당시 사망자 수는 2,000 명설과 20,000 명설이 있다.




人道와 車(마차)도의 구분이 명확하다.
 
마차 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로 연대를 추정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BC 2500년의 유구한 도시였다는 설이다.




현대 최고급 일류 호델 사우나보다
 
더 우아하고 훌륭한 사우나 시설에 경탄이 절로 난다.
 
이때가, 신석기 시대로서 우리나라 선조가 토성 움막에 기거할 때 쯤이다.




언제 그런 재앙이 있었더냐고 하듯,
 
"베수비우스"산 바로 턱밑에 평온히 살아가고 있는 마을 풍경.




이태리 남부 "나포리"만 연안 항구도시 Pompeii를 끼고 도는 "사르누스" 강은
 
베수비우스 활화산을 비웃기나 하듯, 지금도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Pompeii는 수많은 광관객들의 의아스런 눈길을 받아가며
 
옛 화려했던 향수를 갈망하면서
 
도시국가와 로마의 속국 자리를 맴돌다가
 
 1861년 이태리로 완전 합병되었다.


심산/옮김.

                             


Fratello Sole, Sorella Luna - Claudio Bagli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