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그림만 더 진하게 그려 놓고왔네요/ 류경희
미술가를 찾으려고
바다를 갔어요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려구요
음악가를 찾으려
바다를 갔었어요
내 가슴에 묻혀 있는
당신을 향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 하려구요
내가 달려간 바닷가는
미술가도
음악가도 없었어요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발자욱들이
나의 노래고 그림이고 사랑이였어요
내가 이 발자욱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내 안에 내사랑도
지워질까 하나 둘
발자욱들은 지워나갔어요
내 가슴의 그림 배경이 된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다 지워버리려고 했어요
이토록 사랑을
지우려 하면 더 깊이 심장을 찌르는가 봐요
지워지면 그 곳은 무엇을로 채워질까요
변덕심한 마음을 미워할 수 없네요
밑그림만 더 진하게 그려 놓고왔네요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을테지요
내 밑 그림에
색을 칠하고 있겠지요
작고 크고 이쁜 색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림으로말이예요
사랑의 용기도 없는 바보
잊는다고 해 놓고 잊지도 못하는 더 바보예요
산에 화마가 지나간 자리
제비꽃이 피어 있는 것 처럼
용기를 가져야 하는데 말이예요
애써 지워버리려고 하니 더 그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