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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순의 문학기행 ] 향수의 서정시인 정지용[2] 이기순

선하도영 2008. 9. 24. 19:54

[ 이기순의 문학기행 ] 향수의 서정시인 정지용[2] 이기순

정지용의 생가는 옥천읍내 북쪽 끝머리,아직은 개발이 덜된 농촌 풍경이 남아 있는 하계리에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해금 이후,옥천군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생가를 새로 짓고,시비를 세우고,지용문학제까지 개최하는 등,온갖 정성을 들이고 있다.

초가삼간의 본채와 작은 행랑채가 전부인 것은,당시 가옥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게 해준다.돌담장이 깔끔하게 새로 쌓아 둘러쳐져 있고,사립문을 새로 해 달은 집 앞으로는 동네 복판을 가로질러 개천도 안되는 작은 도랑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굳게 닫힌 사립문 왼쪽 안내판에 지용의 생애와 간단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관리인에게 열쇠를 얻어 열고 들어가면 ‘시인 정지용 생가터(1902.5.15 출생)' 표지판과 <향수>를 새겨둔 화강암 시비가 명작의 고향임을 실감하게 한다.

집안을 두루 살펴보지만,보존만을 위한 탓인가 가재도구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빈 집만이 덩그러니 나그네를 맞고 있다.행랑 옆에 마치 고인돌 모양의 커다란 돌 몇 개가 받쳐있는 것은,집 앞 도랑에 다리를 옮긴 것이라고 마을 아낙이 귀뜸해 준다.

생가를 둘러보며 지용에 대한 상념에 젖어 이모저모 나름대로 그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되 짚어 보며,삶의 의미란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여하간,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찾아주는 것은,틀림없이 짧은 인생을 살다 갔을 주인공으로서는 영광이요,무엇인가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는 것이다.

다니다 보면 가치도 없고,기억해 줄 이도 없이 제방 뚝쌓는 데나 써먹어야 할 비석도 즐비하고, 외려 역사에 누를 남긴 자들이 적지 않음을 보며 헛기침으로 돌아서야 할 때가 꽤나 있다.

짐승은 가죽이라도 남겨 남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가지만,영적 존재인 인간으로 태어나 남겨두고 갈만한 일이 내 자신에겐 과연 티끌 정도라도 있겠는가.

필자는 법정 스님의 저서를 가끔 사서 읽는다.
분량으로야 하루 저녁이면 충분히 읽을 만하지만 며칠의 간격을 두고 한 편씩 읽는다.
쉬운 문장이고 평이한 내용이기는 하나,한 편 읽고 며칠 동안씩 법정 스님의 의중을 헤아리며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존재와 생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어떻게 살야야 하는가를 자주 생각도 하게 되고,짧지만 그간 자신의 족적을 돌아도 보지만,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새로운 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징지용의 흉상은 옥천읍내 복판, 낮으막한 동산에 세워져 있다.시민들이 즐겨 찾는 체육공 원에 이 고장 출신의 또 다른 이의 비와 앞뒤로 위치해 있다.

오른 편엔 시민회관인가가 거창하게 들어차 있고,흉상 왼편으로 여기에도 <향수>를 조각 한 시비가 하나 더 있다. 자연석에 네모의 오석(烏石)을 끼운 모양이 휠씬 아담하고 조촐하며 자연스럽다.
시비 주위로 마른 솔잎이 떨어져 소복이 깔린 양이 여간 포근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두 곳 시비 모두에 같은 작품을 기록하기보다,< 향수>에 못지않은 < 고향>을 달리 새겨 두었더라면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운 미련도 가져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얄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고향 1932 )

정지용은 1930년대 한국 시단을 주름잡던 거인이었다.

박목윌, 조지훈, 박두진을 발굴하여 청록파를 키워내고,그들로 하여금 국토의 자연에 대한 친화감을 통해 향수의 미학을 계속적으로 노래하도록,시재(詩才)를 돋구고 토양을 일군 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평가는 민족적 대시인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초기의 시 세계가 감각적 서구 이미지즘의 냄새가 다분하고,후기 작품에서는 카톨릭에 귀의하여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들 떠든다.

어느 시인,작가든 일생 동안 작품 세계가 일관되기보다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화를 거듭하며,작품 정신이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의 전생애를 통한 작품을 거론하는 것도 아니고,단지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에 이만큼의 토속 정취를 노래한 <향수>나 <고향> 시편이면,필자로서는 더 바랄게 없다.

단지 애석한 점은 광복 후,‘조선문학가 동맹'에 깊이 관여하여 문단의 이념화와 대립에 적지 않은 관여를 했다는 것이다.

문학 뿐 아니라,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고,결국은 국토 의 분단으로까지 확대되어 반 세기를 념기지 않았는가.

너 나 할 것 없이 지식인에서부터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전락한 불행한 역사임에 틀림없으나, 과거사의 한 토막으로 인식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정지용이 서울에서 주로 정착해 산 곳은 북아현동이었지만,광복을 앞두고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경기도 부천의 소사로 이주했다.
해방과 동시에 이화여전 교수로 옮겼다가 얼마안가 직장을 그만두고,서예로 소일하다 평상시 복장인 모시적삼 차림으로 잠시 집문 밖에 나섰다가 이내 종적이 묘연해졌다.

북에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쪽의 아들이 남쪽에서 찾겠다고 하니,이건 분명히 개인의 불행을 넘어 민족 모두의 상처이고 아픔이며 고통이다.
양쪽에서 모두 생사를 모른다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며, 휴전 50년이 지났으면서도 저명 인사의 종적조차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겪는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의 문학적 체질로 미루어 보면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없고,후에 숙청 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자의와 타의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고,또 그럴 계제도 아니다.남과 북으로 오고 간 이들 이야기한다면,우리 민족 중에 이산 가족이 아닌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젠 마음을 넓게 갖고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진취적 새 역사의 길을 열고 혈육간에 증오의 감정을 털어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오늘의 분단 상황에 대해 후세의 역사가들이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까.

현재의 우리가 천여 년 전의 삼국시대 역사를 배우면서 느끼는 허탈함과 비교할 때, 그 차 이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런지 자못 궁금하다.

아직은 정지용에 관한 연구 저서나 논문들이 태부족 상태이며 자료가 미흡한 형편으로 그에 대한 본격적 평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